베트남의 천주교 문화. 다낭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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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낭 대성당 


베트남의 천주교 선교는 일본의 천주교 선교와 상당한 관련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예수회는 일본에 본격적으로 선교를 해서 상당한 수의 신자를 양성할 수 있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속 박해 크리 등으로 일본에서 더 이상 선교가 힘들 것으로 판단하고 새로운 대안지를 찾았습니다. 거기서 선택된 곳이 베트남. 베트남은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는 다르게 불교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유교 중심인지라 천주교의 선교가 쉬웠고, 서양인의 거점인 말라카, 마카 오하 고도 가까운 위치였죠. 이 때문에 알렉산드르 드 로드 신부는 1624년부터 베트남의 천주교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위치가 위치인 만큼 알렉산드르 드 로드 신부가 도착하기 이전에도 베트남에 선교사들은 여러 번 들락날락 거렸습니다만, 본격적인 시작은 알렉산드르 드 로드 신부 때부터였고, 그는 1627년부터 북부 베트남에서도 선교를 시작해 6700여 명을 개종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그게 바로 지금 베트남 문자인 꾸옥 응우의 모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베트남어 로마자 표기법은 선교사들을 돕기 위해 만든 것이었지만 베트남인에게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이두, 향찰과 상응하는 베트남의 쯔 놈과 비교하면 로마자 표기법은 베트남 서민에게도 용이한 수단이면서, 기독교에 입문하는 벽을 낮춰 줄 수 있었습니다.


천주교는 당연히 그당시 베트남 지배자들에게 주의를 끌었고 알렉산드르 드 로드 신부는 북베트남에서도 추방당하고, 남베트남에서도 추방당한 이후 유럽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선교에 대한 열의는 잃지 않았고 교황과 결판를 쳐서 선교를 위한 새로운 단체를 만듭니다. 한국의 천주교 전도사에서 수시로 나오는 단체인 파리 외방 전도회가 그 단체 입니. 덕분에 베트남의 선교사들 중 프랑스인의 비율은 극히 높아지고, 프랑스는 베트남의 정보를 비교적 손쉽게 얻을 수 있었던 부작용도 생겼습니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파리 외방 전도회의 활동과 베트남의 프랑스 식민화는 어느 정도의 연관성은 있습니다. 그나마 나은 점이라면 베트남의 역사 연구가 베트남인의 시선만이 아닌 외부인의 시선으로도 관찰하기 쉬워졌단 것이랄까요? 선교사들의 수많은 서한은 베트남사를 연구하는 중요 사료 중 하나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베트남의 천주교 선교의 상황은 여타 유교권 동아시아 국가와 비슷한 경향을 보였습니다. 문화의 차이로 인한 어그로로 박해를 수도 없이 당하지만서도, 앞선 문물로 인해 선교사가 중용되기도 하는 그런 이중적인 상황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베트남의 선교에서 대외에 개방적이었던 남베트남 보다 유교적이고 보수적이었던 북베트남의 비율이 훨씬 더 높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주교도의 수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1800년경 북베트남 인구 600만 중 30~40만이 천주교도였던 반면에, 남베트남 인구 200~400만 중 천주교도는 수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1771년 일어난 떠이 썬의 난은 천주교도의 입지를 바꿀 수 있는 큰 기회였습니다. 떠이 썬 군은 사회적 약자들의 힘을 모으기 위해 처음에는 천주교도들에게 유화정책을 폈었고, 응우옌 푹 아인은 떠이 썬 군을 물리치기 위해 베트남의 주교중 한명이었던 피뇨 드 베엔느 주교와 천주교 자유화를 조건으로 협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응우옌 푹 아인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기 위해 피뇨 드 베엔느 주교에게 자신의 장남 응우옌 푹 까인을 붙여 프랑스로 보냈죠. 영토 할양과 통상까지 제시한 그 굴욕적인 조약은 프랑스의 재정부족으로 DZ에서 KIN로 바뀌었지만 피뇨 드 베엔느 주교는 사비를 들여 용병을 고용하고 응우옌 푹 아인과 같이 싸우다 도중에 사망합니다. 응우옌 푹 아인은 그의 죽음을 크게 애도했다고 합니다. 다만 문제는 응우옌 푹 까인이 도중에 천주교도가 되어 돌아와 제사 거부를 해서 주변의 혈압을 오르게 한 점이 있습니다.


그래도 응우옌 푹 아인은 기존의 약속을 지켜 1802년 베트남을 통일한 이후 천주교 선교를 허용하였습니다. 당시 남부 베트남에 들어왔던 외국인의 기록으로는 술취한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베트남인 소년 사환을 데리고 다니면서 유창한 베트남어로 주변인과 수다를 떨었다는 그런 분위기를 묘사했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많았고 응우옌 푹 아인의 북벌을 할 때 성전으로 인식하면서까지 응우옌 푹 아인을 도왔던 북부도 자유화는 된 것으로 아는데 남부만큼은 기록된 임팩트가 강하진 않았습니다. 천주교로 개종하고 제사를 거부해 주변의 혈압을 올렸던 응우옌 푹 까인 왕자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통일전쟁 도중 사망하였고,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서 주변에 휘둘린 트라우마를 가졌던 응우옌 푹 아인은 응우옌 푹 까인의 아들들의 나이가 그리 적지 않았으면서도 후계자를 살아있던 자신의 아들 중 최연장자였던 넷째 아들 응우옌 푹 담으로 임명합니다. 이후 민 망 황제죠. 

 

문제는 응우옌 푹 아인, 쟈 롱 황제를 계승한 민 망 황제는 재대로 된 유교 덕후였다는 점입니다. 제대로 된 덕후다 보니 인과관계에 목숨을 걸고 괴력 난신적 스토리를 바보 취급을 하던 양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당시 천주교의 어쩔 수 없었던 걸로 주의를 끌었습니다. 무지했던 평민 천주교도 병사의 탄원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1833년 일어난 레 반 코이의 난에서 천주교도들이 신부까지도 대량으로 참가했다는 것에 분노해서 천주교 박해를 재개했습니다. 덕분에 베트남의 천주교 성인수는 117위 성인을 기록하며 세계 3위의 숫자를 기록했습니다. 참고로 한국이 103위 성인으로 세계 4위의 성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뭐 그래도 민 망 황제가 천주교를 무작정 박해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놈의 유교적 덕후가 문제였습니다. 이 혹세무민하는 종교가 무엇이뇨하면서 성서를 직접 신하들과 같이 읽으면서 하는 말이 참 이상합니다. 노아의 방주? 장난하냐? 개그 하냐? 바벨탑?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기본적 논리와 인과관계가 안 맞는데 어쩌자는 거야? 뭔 바보 소리여? 대략 유교적 덕후 증상으로 인한 괴력 난신 혐오와 인과관계 목숨 걸기가 천주교 박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보여주는 참으로 할 말 없는 현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되는 박해는 조선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프랑스의 침공을 불렀습니다. 실제로 프랑스의 침공 자체가 천주교도들의 호응을 전제로 작전을 시작한 것이었죠. 하지만 1858년의 1차 침공에서 다행히도 천주교도들의 호응은 거의 없었습니다. 프랑스가 먼저 공격했던 중부 베트남은 애초부터 신자가 적었으니까요. 베트남의 강력한 방어로 침공이 난항에 빠지자 동승하던 프랑스 신부는 신자가 많은 북부를 공격하자고 건의했는데 사령관은 자원 많은 남부로 출발해서 코친차이나는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대신 천주교도들의 열렬한 호응이 아닌 현지 지주가 전멸할 때까지 일어난 10년 항쟁을 겪어야 했습니다.


프랑스의 침공이 계속되자 일반 베트남인들까지도 천주교도들을 증오하게 되고 박해를 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진짜 천주교도들이 프랑스군을 환영했다고 합니다. 1873년 가르니에의 북부 베트남 침공은 겨우 200여명의 병력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으로 북부 홍강 델타 대부분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성공의 뒷면에는 수십만에 이르던 북부 베트남 천주교도들의 열렬한 호응이 있었죠. 뭐 이 침공은 흑기군의 공격으로 가르니에가 전사하면서 원상복귀였습니다만, 천주교도들이 친불부역자가 되는 현상은 쭈우욱 이어집니다. 

 

이런 상황은 더더욱 일반 베트남인들이 천주교도들을 증오하게 하는데 한 몫을 했습니다. 1885년부터 일어난 근왕령에 호응하는 의병 군은 프랑스에 저항하기 위해 베트남인들이 지역 유지를 중심으로 일어나 전국적인 항쟁을 한 역사적인 반식민 투쟁이라고 합니다만, 그 와중에 꼴 보기 싫었던 천주교도들은 근왕 군에 의해 또 학살당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천주교도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친불부역자가 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후 프랑스 식민통치가 안정기에 드러서면서 천주교에 대한 어그로는 세월의 힘으로 서서히 줄어든 듯합니다만, 천주교도들이 친불부역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은 여전했습니다. 그래도 어그로가 줄어든 만큼, 친 불 부역만 이 아닌 독립운동에 나서는 천주교도들도 여럿 생겼고, 그중 한 명이 응오 딘 지엠 이후 정 줄 논 독재자로 유명한 응오 딘 지엠 맞습니다. 그 와중 프랑스 식민 당국은 프랑스 답게 베트남의 괴뢰 황제를 천주교도로 바꾸려고 했고,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의 황후로 천주교도인 남 프엉 황후를 선택했습니다. 뭐 연애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바오 다이는 프랑스 유학 중에도 천주교로 개종을 하지 않았지만 남 프엉 황후와의 아들은 천주교도였습니다. 그래도 남 프엉 황후도 친불부역자로만 보긴 뭐한, 모범적인 황후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이방자 여사가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나름 존경을 받게 했던 자선 활동이나 태도 등을 남 프엉 황후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봤자 천주교도들은 친불부역자들의 비율이 높고 일반 베트남인들의 어그로를 끄는 집단 베트남이 독립하고 디엔 비엔 푸 전투 이후 남북으로 분할되자 천주교도들은 남베트남으로 대규모 엑소더스를 감행합니다. 그리고 또 어그로를 끌었죠. 이번에도 자신들의 의지가 아닌 광신도 응오 딘 지엠의 의지로 응오 딘 지엠은 산악지방 개척촌과 전략촌 등의 요지에 대부분 천주교도들을 임명합니다. 그리고 그 가족이나 측근들도 어그로를 제대로 끄는 발언을 하고 그 결과는 틱 꽝 득 스님의 분신자살. 그리고 유명한 바비큐 발언의 그 결과는? 베트남 전쟁 이후 천주교도들의 대규모 엑소더스 보트피플 중 상당수가 천주교도입니다. 


뭐 이런 상황을 여러번 겪었지만 천주교도들은 여전히 베트남에 상당히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베트남 천주교도들의 상황을 보면 자의만이 아닌 타의로 민족반역자, 부패의 원흉이 되는 슬픈 상황을 수도 없이 겪었단 점에서 조금 안타깝네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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